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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누리,『한여름 손잡기』
    봄날의 시집 2
  • 11,000원
    • 저자
    • 권누리
    • 출판사
    • 봄날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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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시
쪽수 : 112p
크기 : 102*205mm
출간일 : 2022.01.31


‘빛’과 ‘사랑’의 시집, 『한여름 손잡기』
이 시집은 옷장 문을 열고 나와, 빛을 향해, 사랑을 향해,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마음의 기록입니다. 굴광성(屈光性)의 마음의 기록입니다. 시인 권누리는 투명도가 높은 눈부신 언어로, 크리스털 유리잔에, 스테인드글라스에, 프리즘에 닿는 찬란하고 어지러운 빛을 다정하게 담아냅니다.

침묵
모든 시는 어떤 형태로든 침묵을 품고 있습니다.
권누리의 시는 지금 이 순간 세상 군데군데 숨겨져 있다고 여겨지는 온갖 형태의 침묵을 가장 끈질기게 비집으며 시작됩니다.
시인은 침묵의 자리를 다른 소리 체계가 꿈틀대는 곳임을 적극적으로 감지하고, 그곳으로부터 지금 세계가 원하는 답을 거절하는 질문이 경쾌하게 새어나오도록 둡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흰 발목 양말이
흘러내려요 걷다 멈춰 서고, 다시
그걸 반복해요 왼쪽이 그러면 오른쪽이 그러는 것처럼
나란히 무너지고 있거든요 내일이 그러나

이미 사랑하고 있답니다 사랑을
나에게 스스로 말할 용기는 없지만,

걸어가도 아무도 마주치지 않을 거예요
어차피 나는 천천히
타 들어갈 텐데요 빛이 빛을 부수는 것처럼.

- 「하트*어택」부분

오늘 우리의 몫이란 비록 눈물을 참지 못하겠더라도 기죽지 않고 “창 너머로” “찰랑”이는 “노란빛”을 동료삼아 “옷장 맨 밑 칸 서랍을 열어 상자를 꺼”내고, “미래”의 냄새를 맡는 것입니다.
권누리 시에서 빛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곳에 자주 찾아감으로써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사물들, 존재들이 감춰왔던 감정에 제 색채가 깃들도록 돕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오지 않는 방 꾸미는 일을 한다

그것이 이번 생 내게 주어진 일이다

블라인드를 바닥까지 길게 내려도
물결처럼 들이치는 빛
이런 눈부심은 지구에서 가장 멀리 있는
죽음도 깨울 수 있겠지

나는 눈을 뜬 이 방에서 큰 계획을 만들어본다

(중략)

요람은 더욱 푹신해지고 몸을 구겨도
더는 돌아갈 수 없는 어린이용 침대 곁에서
웅크린 채 잠든다 높이 매달아둔 모빌은
파르르 돌아간다 소용돌이의 소용돌이의 소용돌이가 무수한 소문을 만들어내면 거기에는

여름의 조각에 비싼 값을 매겨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팔아대는 나의 영원하고
무용한 사랑이 있다

- 「여름 모빌」부분

스테인드글라스 너머에서 축복이 들이친다 호되게. 굴절은 쉽게 빛을 꺾어버리지만 빛을 조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인간이 조각한 정교한 다이아몬드 모양의 빛은 발치에 있다 고개 숙이면 보이는 그것의 색은 샛노랑 빛이 빛을 모사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를 가져다 붙여도 샛노랑 다이아몬드 투과한 빛은 샛노랑 다이아몬드 모양의 빛.

- 「섬섬」부분

언뜻 아무런 의도도 없는 듯싶어 무심해 보이는 ‘빛’은 바로 그러한 이유로 지금 세계가 잘 모르는 이야기의 문을 엽니다.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잠들어 있는 무언가도 깨웁니다.
투명한 창을 통해 비치는 굴절된 이미지를 치열하게 경유하면서 도리어 세계와 합일되지 않는 다른 삶의 방식도 있음을 알리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관계에 최대한 몰입함으로써 지금 여기에 있는 모종의 감정이 거짓이 아님을 알리기도 합니다.
권누리의 시는 압니다. “그러면 안 되었다고 말하는 인간들 틈”이 이루는 암전된 세상에서 지금을 “전부라고 믿는 마음”에 등을 돌리는 법에 대해서요.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섬섬(閃閃)한 문양을 빚어내는 방식까지도요.

사랑
권누리의 시는 “우주와 우주 사이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완전히 놓친 것”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우리의 언어로” 여기, 사랑이 있었음을 그리고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었음을 발음하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권누리 시의 몸짓을 침묵에 잠긴 세계를 위해 적극적으로 다정을 시도하는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눈물을 참지 않고, 차오르는 감탄을 억누르지 않으며, “멈추지 않는 그네”처럼 “마음이 찰박거리”는 상태를 자원 삼아 사랑을 무럭무럭 키워낼 줄 아는 이의 움직임으로요.

내가 믿는 것을 언니도 믿을까?

좋아하는 음악을 큰 소리로 들을 수 없는 얄팍한 유리벽으로 만들어진 이 세계에서 낱낱이 훑어보는 검은 눈동자

비치는 건 우리의 작은 방
한 켤레의 흰 양말

(중략)

아직도 생의 무한한 나선계단을 돌아내려가고 있다니

납작한 지구 위에 더 납작하게 엎드려 회전을 인내하는 마음, 언니는 알까?

나 더 위협적으로 굴려고
투명한 바닥 위에서 쿵쿵 뛸 거야

(중략)

언니, 한 번밖에 가보지 못한 클럽의 네온사인 기억해?

나는 이제 제법 길을 잘 찾는다
지도를 읽는 건 진달래와 철쭉을 구분하는 일

(중략)

누군가 난간에 버리고 간 라이터를 쥐고 딸깍이며 걷자 나는 앞으로 더 무시무시해질 거니까

- 「내비게이션 미래」부분

시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투명한 바닥” 위에서 “쿵쿵” 뛰면서 “얄팍한 유리벽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안기는 착각에 속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겪는 감정이 품고 있는 진실을 따르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끝까지 무정하지 않으려는 이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사랑을 사수하기 위해서 다정을 발휘하는 이에게 미래는 다르게 열립니다. 이것을 믿어도 된다고, 그러니 쭈뼛거리며 다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아도 된다고, 권누리의 시는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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