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이 세계를 품었다 뱉는 아주 우연한 순간,
당신과 나의 자리가 바뀌는 찰나
“이제 당신들이 술래다!”
“김지승 덕분에 나이 듦이 기다려진다. ‘쇠락’과 ‘쇄락’이 가깝듯이 당신과 내가 가깝고 이야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기에.”
_양효실(여성학자)
“페이지를 펼치면 닿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순하고 다정하고 안전한 품.”
_유진목(시인)
시치미, 침묵, 거짓말과 과잉으로 빚어낸
‘김지승이라는 장르’의 마술적 글쓰기
연필을 향한 애호의 마음을 “잘 부서지는 존재”들에 포갠 《아무튼, 연필》, 아픈 몸의 여성이 언어를 입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정을 내밀하게 써내려간 《짐승일기》의 저자 김지승이 이번엔 사물들이 토해내는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술래 바꾸기》는 사물에 깃든 기억을 술래처럼 찾아다니며 “하나의 사물이 세계를 품었다 뱉는 아주 우연한 순간에” 흘러나온 이야기를 밀도 높은 사유와 위트로 꿰어낸 산문집이다. 의자. 모빌. 수건. 가위. 모래시계. 단추. 돌. 비누. 가발. 지도. 안경. 백지. 비석. 설탕과 얼음. 저자는 사물들이 연결되고 분열되다가 결국 각각 동등한 아름다움을 획득하는, 그리하여 세계가 잠시 오작동하는 순간들을 포착하고자 했다. 이 삶에서 저 삶으로, 이 존재를 저 존재로, 이 시선에서 저 시선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며 위계와 이분법에 균열을 내는 유쾌한 시도.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시치미, 침묵, 거짓말과 과잉”으로 빚어낸 마술적 글쓰기는 우리 자신이 고정된 존재가 아니며, 이 세계 역시 단일한 무엇이 아님을 매혹적으로 펼쳐낸다.
“사실만으로는 그러니까 시치미, 침묵, 거짓말과 과잉 없이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없었다. 문제는 끊임없이 유동하는 모빌을 어떻게 시치미, 침묵, 거짓말과 과잉 안에 고정하여 담을 것인가였다. 우선 시치미 뚝 떼고 입 싹 닫고 모르는 척 거짓말을 시도해 보기로 하자.”
- <모빌>에서
내가 룰이라고 여겼던 것이 지켜진 순간,
아주 잠깐 세계가 마음에 들었다
<수건>이라는 글에서 시간차를 두고 술래가 되었던 두 개의 경험을 병치하며 김지승은 이 세계에서 누가 술래이며 술래는 무엇인지 질문한다. 전학 간 학교에서 수건돌리기의 술래는 언제나 K라는 아이이다. ‘술래’가 한 사람으로 고정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힘의 흐름”이 개입된다는 사실을 ‘나’는 자연스럽게 간파하게 된다. 전학생의 규칙으로 놀이를 해보자는 선생님의 제안으로 딱 한 번 돌아가며 술래를 했던 날, 아주 잠깐 세계는 다정해진다.
“돌아가며 술래를 하는 것. 내게는 그게 수건돌리기에서 가장 중요한 룰이었다. 그때가 내가 룰이라고 여겼던 것이 지켜진 거의 유일한 순간이었다. 아주 잠깐 세계가 마음에 들었다.”
- <수건>에서
하지만, 곧 K가 전학을 가고 힘의 흐름은 좀 더 잔인한 쪽으로 바뀌어 K를 대신해 ‘내’가 졸업 전까지 술래가 된다. 그곳을 떠난 지 오랜 후 “K와 내가 차례로 술래였던 그 도시에” 가려던 ‘나’는 버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 낯선 고장에 도착한다. 그리고 수건을 머리에 두른 노인들 틈에 휩쓸려 엉겁결에 얼굴도 모르는 치매 노인을 찾아다니게 된다. 여성노인들과 ‘공동 술래’가 된 셈이다. 수건돌리기에서 맡았던 술래와 사라진 노인을 찾는 술래, 두 술래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술래는 주체일까, 타자일까?” 본격적으로 책 속으로 들어가기 전, 독자가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문장이다. 술래는 숨는 사람을 찾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모두가 숨고 피하는 ‘타자’이기도 하다. 자기 의자를 들고 다니고, 돌을 만들고, 지도를 머릿속에 넣고, 비석을 밟고 선 여자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술래의 정체성을 허물고 해체하며 이 세계의 규칙과 질서를 재조립한다. “술래 바꾸기”는 “돌아가며 술래를 하는” 룰의 필요는 물론이고 ‘술래’의 의미를 교란하는 가능성까지 담은 중의적 메타포인 셈이다.
술래여도, 술래 아니어도 재밌는
시적이고 윤리적인 관계 맺기
상실과 소멸,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한 응시는 여전하지만 《술래 바꾸기》에 이르러 김지승의 시선은 한층 더 확장된 듯 보인다. 저자가 선언하듯 밝힌 대로 “이 책에 관해서라면 타자가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꿈과 현실,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가로질러 도착하는 장소는 노인, 외국인, 미혼모, 왕따, 차학경, 메두사 등등 ‘타자들’이다. 특히 이 책에 가장 많이 할애한 타자는 김지승이 글쓰기 수업 및 인터뷰로 만나온 ‘여성노인’들인데, “직선의, 인과적인, 정량화된 시간선상”에서 벗어난 이들이야말로 술래 바꾸기의 명수들이다. 여성노인들의 명랑한 촌철살인은 우리에게 친숙한 사물들조차 낯설게 만드는 동시에, 객채화된 존재, 사물화된 존재들을 ‘이야기’의 주체로 세우고 연결하며 끝내 회복시킨다. 몸을 낮추고 누군가의 중요한 무언가를 함께 찾고(<단추>), 아무리 울어도 안 깨지는 돌 같은 거 “애기들 맘에는” 안 쌓이기를 기원하고(<돌>), 안경을 쓰는 대신 타인의 실수를 못 본 척하는(<안경>) 여성노인들을 통해 독자들은 “시적이고 윤리적인 조건으로 관계 맺”는 일에 관해 새롭게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시적이고 윤리적인 조건으로 관계 맺고 유동적인 몸으로 비인간, 사물과 만난다. 내게는 몇몇 여성노인들이 그런 존재로 남았다. 한 사람이 술래를 오래 한다 싶으면 일부러 잡히거나 들켜 주는 것도 그들이었다. 술래는 잡으러 다니며 재밌고, 술래 아니면 잡힐까 봐 두근두근 재밌고.”
- <에필로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