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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행한 불행
  • 16,800원
    • 저자
    • 김설
    • 출판사
    • 책과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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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에세이/여성학
쪽수 : 252p
크기 : 135*195mm
출간일 : 2023.06.20

반팔 티셔츠 모델 착용 이미지-S1L3
뒤틀리고 조각나는 아픔의 시간을 견뎌온
나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엄마는 불확실한 행복보다 익숙한 불행을 선택했다
인생은 결코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철이 들면서부터 작가는 누구보다 부모의 이혼을 바랐다. 눈앞에서 익숙하게 되풀이되는 엄마의 오랜 불행을 두고 볼 수 없어 이혼을 애타게 종용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엄마가 고민한 시간은 짧았다. 엄마는 불확실한 행복보다 익숙한 불행을 선택했다. 스스로 불행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엄마를 보며 작가는 자기 자신에게 주문을 외듯, 결혼의 행복은 환상일 뿐이며, 되도록 결혼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라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무언가를 멀리할수록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그것에 대한 욕망이 강하게 들끓고 있다는 게 맞는 말일지 몰랐다. 사랑에 눈이 먼 엄마처럼, 아빠가 거짓말을 해도 번번이 속아만 준 엄마처럼, 작가는 눈부신 젊음의 어느 시절 마음의 문을 모로 닫아건 채 오직 결혼에만 성급하게 매달렸다. 결혼을 잘못해서 닥치는 불행보다 결혼 후에 주어질 안정이 더 유혹적이었다.

성급한 결혼과 급작스러운 이혼이 가져다준 것
물론 결혼은 아픈 젊은 날의 탈출구가 결코 아니었다. 막상 결혼하고 보니 진짜 삶은 다른 곳에 있을 것만 같았다. 인생이 이게 아닌데 싶고, 서러움이 복받쳐 엉엉 우는 날이 많아졌다. 어디에 있든 여기보다는 행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행복이란 어린 시절 작가의 엄마에게 그러했듯, 너무도 낯설고 불확실한 약속일 뿐이었다.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한 삶은 되돌리기 힘들었다. 카지노에 전 재산을 갖다 바친 남편의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없었다. 매일 죽는 방법을 생각하며 지내던 중 숟가락에 묻은 이유식을 힘껏 빨아 먹는 딸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혼을 결심하고 모든 걸 혼자 힘으로 해내야 했다. 등에 업힌 딸이 작가를 겁 많은 여자이면서 동시에 겁 없는 여자로 만들었다. 그때부터 작가는 철없어도 안 되고 아파서도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삶을 실험하기로 결심했다
혼자의 몸이 된 작가는 삶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산후조리원 청소, 아동복 판매, 대리운전. 아무거라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온갖 일을 했다. 처음 겪는 일들은 두렵고 힘들었으며,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더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애써 자기 최면을 걸었다. ‘나는 여기 살러 온 게 아니라 관광하러 온 거야.’ 돈이 없어 엄마에게 물려받은 반지를 팔았을 때는 관광하다 소매치기를 당한 거라고, 회사를 그만두고 싶을 때는 직업 체험을 하러 온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20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이어진 관광과 실험은, 그러나 아직도 그 끝을 내보이지 않은 채였다.

이곳엔 애초에 바닥 따위 없는 게 아니었을까
이혼 후 5년이 지났을 때부터 끈질기게 이어진 전남편의 구애는 결국 15년 만의 재결합으로 이어졌다. 사랑이나 연민 따위의 감정이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 불행의 파도에 휩쓸리기보다 파도가 오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 위에 올라탈 수 있기를 바랐다. 앞으로의 삶에 행복이 올지 불행이 올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것이 오더라도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로, 적어도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삶이라면 담담히 인정하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각오를 단단히 했는데도 다시 시작한 결혼 생활은 힘에 겨웠다. 하루도 빠짐없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는 남편을 보며 삶에는 애초에 바닥 같은 건 없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인생이 납득할 수 없는 문제로 가득했고 하루하루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부서지는 생의 조각으로 쌓아 올린 단단한 평온
작가는 바닥나려는 희망과 용기의 힘을 애써 믿으며 자신의 삶을 글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책상의 불을 켜고, 하늘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 채 순응하며 사는 것에 대해, 현실에 안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고통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자주 고민하며, 오늘의 불행을 내일로 끌고 가지 않겠다 수없이 다짐했다. 아마도 물극필반(物極必反)의 이치였을 것이다. 삶의 고난을 불러일으키는 불협화음을 외면하지 않고 가만히 귀 기울일수록 내면 깊은 곳에서 단단한 평화가 차올랐다. 누군가는 타협과 포기 아니냐고 평가할지도 모르겠지만, 기실 그것은 고난의 세월을 버텨온 자기 삶에 대한 결연한 긍정의 의지에 다름 아니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누구도 손 내밀어주지 않고 대신해주지 않는 삶을 홀로 버티며 여기까지 걸어왔다. 그 세월을 견디다 보니 사소한 것은 내버려둘 수밖에 없고, 아무리 나쁜 일도 결국은 지나간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작가는 고백한다. 예기치 못한 불행의 습격이 비록 삶의 굽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새겨놓았지만, 그것이 일면 자기 안의 보이지 않는 어떤 부분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고. 그런 의미에서 또한 《다행한 불행》은 어두운 절망 속에서 태어난 눈부신 희망을 고하는 나직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크고 작은 삶의 모든 모순에도 불구하고, 이제 더는 불행에 지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나아가겠다는. 그리하여 기어이 다시 삶을 사랑하고야 말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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