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나는 친구가 재밌게 읽을 만한 글,
읽고서 좋아할 만한 글이 쓰고 싶어졌다.”
시에 대해 묻기보단 자신만의 시를 선언하는
씩씩하고 쓸쓸한 시인의 문학 일기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시집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꿈을 꾸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되었다』를 출간하며 꿈과 생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강렬한 작품을 선보여 온 권민경 시인의 첫 번째 산문집 『등고선 없는 지도를 쥐고』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칼잡이’라 정의 내리며 자신만의 꿈 찾기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그의 시 세계가 지금과 같이 뚜렷한 형태를 갖출 수 있었던 데에는 ‘여정’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숱한 시간들이 바탕에 있다. 『등고선 없는 지도를 쥐고』에는 권민경 시인이 친구가 재밌게 읽어 주기를 바라며 처음 문학적인 글을 써 보기로 했던 순간부터, 글에 점차 스스로를 투영해 가며 자신만의 형식을 깨닫는 순간, 그리고 그 순간들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끼친 유년 시절의 기억까지 촘촘히 깃들어 있다. 권민경 시인의 시종 담담하고 씩씩한 태도는 흔히 쓸쓸함이나 고독함이라 떠올리기 쉬운 문학의 얼굴에 가뿐한 웃음을 띄운다.
만일 당신이 당신만의 여정을 겪어 내는 도중 빼곡하게 들어찬 뜻밖의 등고선을 마주했다면, 『등고선 없는 지도를 쥐고』를 펼쳐 보자. 이 책과 함께라면 웃음을 잃지 않고도 아득한 언덕길을 넘어갈 수 있다. 『등고선 없는 지도를 쥐고』는 즐거움으로부터 시작되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담담함을 바탕에 두고 씩씩하게 이어지고 있는, 다름 아닌 권민경 시인의 문학론이기 때문이다.
■친구가 좋아하는 것들을 가득 넣은 바구니를 들고
어느 날 문득 나는 최민이 재밌게 읽을 만한 소설, 읽고서 좋아할 만한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
-26쪽
문학이라는 장르의 기원을 논할 때 ‘유희’를 빼먹을 수는 없다. 권민경 시인의 문학도 즐거움으로부터 피어났다. 고등학생 시절 열린 백일장, 권민경 시인은 자신과 이름이 같아 ‘최민’으로 불리던 친구가 소설로 우수상을 수상했던 것을 기억한다. 친구는 모두가 귀찮다는 얼굴로 수필을 써 내려갈 때 30분 만에 완성한 소설로 우수상을 거머쥐었다. 그 친구의 소설을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던 권민경 시인은 어느 날 문득, 그에게도 읽는 즐거움을 선사해 주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이고, 곧 친구가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넣어 소설을 써 보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그렇게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도 한 스푼 집어넣고, 친구가 즐겨 읽던 작품들의 발랄함과 엉뚱함도 한 스푼씩 섞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소설이 완성된다.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친구가 좋아하는 것들만 잔뜩 집어넣어 즐거운 마음으로 써 내려간 작품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마치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가 그러하였듯 아름답고 경쾌한 마을을 닮은 마음으로부터 출발한 권민경 시인의 문학은 어디를 향해 나아갈까?
■바깥에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
시간이 흘러간다. 그 감각은 문득 나를 자유롭게 했다.
깨달음이란 뜬금없이 찾아온다. 그것은 깨달음이 너무도 단순하기 때문일 것이다.
-27쪽
친구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권민경 시인은 점차 문학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기 시작한다. 문학을 통해 담아내고자 하는 자기만의 것,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자기만의 형식을 고민하며 권민경 시인은 시와 가까워진다. 혼자 있을 때면 끝을 모르고 내달리던 생각은 시에서의 빠른 이미지와 장면 전환으로 적용되고, 뚜렷한 원인을 모른 채 거듭 죽음에 대해 생각하던 버릇은 시에서 꾸준히 다뤄 온 주제로 연결된다. 이런 식의 깨달음이 “너무도 단순”한 것이라고 표현할 만큼, 권민경 시인은 무엇이든 과장하는 법이 없다. 대충 그려진 지도 탓에 여행 중 뜻하지 않은 언덕길을 무수히 넘게 될지라도, 모두 자신의 선택이므로 마주하게 될 모든 순간을 기꺼이, 기왕이면 즐겁게 받아들이며 씩씩하게 나아간다. “간절히 원하던 것들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 별 기대도 않던 행운들이 찾아왔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삶이라는 걸 절감하며 자랐다. 지금도 자라고 있다.”라는 그의 말이 체념이 아니라 미래를 도모하는 말로 들리는 것은, 즐거움으로부터 피어난 그의 문학이 여전히 그 태도를 잃지 않고 나아가고 있는 덕분이다. 유희로부터 시작된 문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자유로움이라면, 권민경 시인의 문학 또한 자유로움을 향해 걷고 있는 게 아닐까. 때때로 찾아오는 쓸쓸함을 애써 부정하지 않는 가뿐한 발걸음으로.